우암 송시열(1607-1689)
우암은 [승정원일기] 숙종 원년(1675) 6월 19일조에 기술된 경상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1675년 6월 10일 장기에 도착해 장기성 동문 밖 마산리 사인(士人) 오도전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다.
1679년 4월 10일 거제도로 이배되기까지 4년여 장기에 머문 우암은 17세기 후반 조선사회를 정치, 문화, 사상적으로 지배했던 국로(國老巨儒)답게 변방의 범속한 풍속을 가졌던 장기를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유향(儒鄕)으로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암 유배 4년 동안 중앙의 우암 인맥들이 장기를 무수히 방문했다.(예로서 1676년 2월 3일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의 방문)
이들의 방문은 장기 사람들에게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정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를 조성시켰다. 그리고 그는 영남지역 전체에도 영향력을 미쳤는데, 인근 고을의 무수한 수령들과 학자들이 문안을 올리고 학문을 전수받기를 간청했을 정도였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은 무었보다 우암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생활을 하며 4년을 보냈을까 하는 부분이다.
조선시대 당시 유배 되었던 사람들의 기록 ~ ~
다산의 유배 생활
[정약용의 유배지, 장기]
○ 다산은 1801년 1월 19일에 터진 <책롱사건>, 즉 신유박해라고도 부르는 천주교 박해사건에 연루돼 장기로 유배되었다.
1801년 3월 9일 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마현리 ‘구석골’ 늙은 장교 성선봉 집에서 기거했다. 그해 10월 20일까지 7개월 10일(220일) 동안 장기에 머문 다산은 인간으로는 가장 불행한 귀양살이 기간이었지만 불굴의 투지로 고통과 좌절을 극복하며 학문연구와 시작에 전념했다.
○ 다산은 220일 동안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고시 27수> 등 60제(題) 130여 수에 달하는 주옥 같은 시를 창작했고, 서인과 남인의 예론(禮論) 시비를 가린 <기해방례변>, 한자 발달사에 관한 저술인 <삼창고훈>, 한자 자전류인 <이아술 6권>, 불쌍한 농어민의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기 위한 <촌병혹치> 저술, 그리고 아들에게 보낸 3통의 편지 등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답게 가히초인적인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 <기성잡시 27수>에는 장기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눈에 비친 당시 장기의 모습들이 그림 그리듯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다산은 처음에는 장기의 모습과 풍물들을 묘사하다가 차츰 그들의 삶 속에 있는 풍속과 애환을 그리는 데로 나아갔고, 그 속에서 백성의 가난을 발견하고, 가난의 원인이 당시 사회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함을 밝히려 애썼다. 그러면서 이곳 사람들의 애환과 관리들의 부패상을 우화적이고 은유적인 시로 표현했는데, 그 대표적인 시가<장기농가 10장>이다.
○ 다산은 또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이를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글로 남겼고,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회오와 억울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정조와의 끊을 수 없는 그리움에 잠기기도 했다.
다산은 자신보다 126여 년 전에 장기로 유배왔던 우암과는 대조적인 귀양살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배소에는 주인 외에는 거의 인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자취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몇년전 오어사 갈때는 장기마을 송시열과 정약용 유배지가 없었다
장기 읍성 다 둘러볼 시간이없어 아쉽다
장기마을 교통이 어떠했을까 상상이 간다
좋은 공부 하고 오어사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