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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출지

민들레a 2020. 9. 2. 18:30

지정면적 7,021㎡. 사적 제138호. 월성(月城)에서 남천(南川)을 따라 남산동록(南山東麓)으로 접어들면 정강왕릉(定康王陵)을 지나 남산동에 이른다.

남산동 한가운데에 3층석탑 2기가 있고 바로 근처에 양피못[壤避池]이 있으며, 얼마 떨어져서 사금갑(射琴匣)의 전설이 간직된 서출지가 있다.

즉, 『삼국유사』기이(紀異) 제1 사금갑조에 실려 있는, 신라 21대 소지왕(일명 비처왕)이 즉위 10년(488)에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적힌 내용을 살펴보면 이 연못은 인위적으로 꾸며진 원지(苑池)가 아니라 마을 밖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못으로 보이며 곡지(曲池)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사금갑의 전설이 생겨난 뒤 서출지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자연 그대로의 유수지(溜水池)이기는 하나 주변의 경관이 수려하여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경승지가 되고 있으며 조선조로 접어들어서는 1664년(현종 5)에 임적(任勣)이라는 사람이 물 위로 누마루가 돌출한 팔작지붕의 건물을 지어 글을 읽는 한편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현재 이 건물은 폐가가 되기는 했으나 서출지의 서북쪽 구석진 물가에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연못의 경관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으며, 추녀에는 ‘이요당(二樂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을 감싸듯이 우거진 여러 그루의 팽나무 고목과 물가의 배롱나무는 이 못에 원지에 못지않는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경주 서출지(慶州書出池))]

 

 

 

 

 

 

 

 

 

서출지 야경

신라 21대 소지왕이 서기 488년 정월 보름날 행차에 나설 때다.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말했다.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십시오" 왕은 장수를 시켜 따라가게 했다. 동남산 양피촌 못가에 이르러 장수는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다. 이때 갑자기 못 가운데서 풀옷을 입은 한 노인이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장수께서는 이 글을 왕에게 전하시오" 노인은 글이 써진 봉투를 건넨 뒤 물 속으로 사라졌다. 왕이 봉투를 받아보자 '열어보면 두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 라고 적혀있었다. 이를 본 신하가 말했다. "두사람은 평민이고 한사람은 왕을 가리킴이오니 열어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왕은 신하의 조언에 따라 봉투를 뜯었다. '사금갑(射琴匣)' 즉 '거문고 갑을 쏘아라' 라고 적혀 있었다. 대궐로 간 왕은 왕비의 침실에 세워둔 거문고 갑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거문고갑 속에는 왕실에서 불공을 보살피는 승려가 죽어있었다. 승려는 왕비와 짜고 소지왕을 해치려한 것이었다. 왕비는 곧 사형되었으며 왕은 노인이 건네준 봉투 덕분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이 연못은 글이 적힌 봉투가 나온 곳이라 해서 서출지라 부른다. 소지왕 10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40년 전이다. 신라 눌지왕 시대에 묵호자가 불교를 전하러 왔으나 펴지 못했다. 소지왕 시대 아도 스님 역시 불교전파에 실패했다. 법흥왕 15년 이차돈의 순교로 비로소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이다. 당시 신라 귀족들은 민속신앙 특히 조상을 섬기는 신앙이 강해 쉽게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출지의 전설은 전통적 민속신앙속에 새로운 불교문화가 전래되는 과정에 빚어지는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 펌)